문화일반

식민지 근대화기 지역 엘리트들의 자치 실험, 민주적 회의 문화,

입력 2025.10.15 09:22 김혜진 기자
일제강점기 ‘호남종회 회의록’ 번역 출판
공동체 윤리 원형 담은 귀중한 역사 기록

일제강점기 호남 지역의 씨족 자치조직이 남긴 회의록이 90여 년 만에 한글로 번역돼 세상에 나왔다. 창녕조씨 광주전남종회(종회장 조영동)가 최근 1934년과 1935년에 작성된 '호남종회 회의록'과 '임시총회 회의록'을 현대어로 옮겨 출판했다.

이 회의록은 당시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 조선총독부의 검인을 받았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1934년에 조직된 호남종회는 광주와 전남·전북, 제주를 관할한 대규모 조직으로, 대종회가 결성되기 전 도 단위 최초의 종회였다. 주요 안건은 창녕조씨 시조의 묘각인 종덕재 중건과 위토 구입이었으며, 교통이 불편한 시대에도 영남과 호남의 종친이 함께 참여해 1936년 종덕재 중건을 완성했다. 회의록에는 찬반토론과 표결 등 의사결정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으며, 종회 규약도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다. 회의는 당시 광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의 동창여관(현 광주 동구 중앙로 198번지 동양저축은행 자리)에서 있었다.

이는 단순히 '족보 번역' 수준을 넘어, 근대 한말~일제강점기의 지역사회 조직과 자치 의식, 그리고 씨족(氏族) 단위의 근대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단서로 주목된다.

1934~35년은 식민통치가 가장 강고하던 시기다. 그때 작성된 회의록이 민주적 절차, 찬반 토론, 합리적 의사결정, 명확한 규약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적 회의 문화와 자치 정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친목이나 제사 조직을 넘어, 근대적 자치의식과 공공적 운영방식이 지역 명문가 내부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회의록의 목적이 '종덕재 중건과 위토 구입', 즉 조상의 제사를 위한 공간과 재정 기반 마련이었다는 점은, 그 시대 공동체의 정체성과 윤리의 핵심이 '조상 숭배'라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 제례 차원을 넘어서, 영남과 호남이 교통이 불편한 시대에 연대했다는 점은 지역 간 협력과 네트워크 의식을 드러낸다. 여기에는 "한 혈통을 잇는다는 공통 정체성"이 식민지의 억압 속에서 민족적 연대의 대체적 형태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당시 '호남종회'는 도 단위 최초의 결성 조직으로, 중앙의 '대종회'보다 앞서 출범했다. 이는 일제의 행정 통제 속에서도 지방 명문층이 자발적·조직적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특히 국한문 혼용으로 회의록을 남긴 점은, 근대 전환기의 언어 감각과 문해력의 변화, 즉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선 문체적 기록으로도 가치가 크다.

조선총독부의 '검인'을 받은 회의록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문서가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식민지 행정 체계 속에서 공인된 근대 문서라는 뜻이다. 역사학적으로는 '식민지기 민간단체의 자치운영과 규약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1차 사료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번역 출판은 과거의 '가문'이라는 폐쇄적 조직을 넘어, 그 안에 내재된 공공성·합리성·연대의 전통을 되살려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조호권 전 광주시의회의장은 "이번 호남종회 회의록 발간을 계기로 선조들이 이룩하신 훌륭한 정신을 이어받아 숭조(崇祖), 화합(和合), 애족(愛族)"의 종훈 아래 더욱 단합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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