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팔영산과 두만강서 국권 회복 꿈꾼 의병장

입력 2025.10.16 09:27 임창균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⑭ 신성구
고흥서 2년간 전투 50여회나
팔영산에 120명 대규모 주둔
보성 안규홍과 연합의진 구축
치열했던 만경암 전투서 패퇴
두만강 일대서 의병부대 조직
고흥 팔영산 전경.고흥군 제공

광복 80주년을 맞은 지난 8월 고흥 능가사에 속한 만경암 암자터가 '전라남도 사적지'로 지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능가사는 국립공원 팔영산에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만경암 일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고흥의병의 항일운동을 전라남도가 인정한 것이다. 8월 29일 만경암 의병들을 추모하는 추념식에서, 신민호 전남도의원은 "만경암 사적은 화순 쌍산의소처럼 국가 사적 지정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며 만경암 일대에 대한 철저한 발굴 조사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이번 남도 의병 열전에서는 만경암을 중심으로 전개된 고흥의병을 다루려 한다.

◆ 나라의 위기마다 일어난 고흥

무등일보에 마한사, 독립운동사 등을 연재했던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는 "득량만을 감싸고 있는 보성 조성과 고흥 대서가 과거 마한의 대국을 형성했다"고 살핀 바 있다. 고흥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가야, 일본 등을 연결하는 항로에 위치해 중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고흥은 이순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주력을 형성해 나라를 구한 고을이자, 한말에는 포두면과 도양읍에 두곳의 훈련장이 설치돼 동학농민군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흥 동학 지도자 유희도가 이끈 고흥 동학 농민군들은 제2차 동학농민전쟁 때 섬진강을 넘어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고 장흥 석대들 전투 직후, 장흥, 보성 지역 동학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끝까지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렇듯 국운이 위태로울 때마다 들고 일어선 자존감이 있었기에, 고흥의병은 팔영산에서 대규모 일본군과의 혈전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고흥지역 서훈자 명단에는 팔영산 전투에 참여한 의병들의 전투 공적이 담겨 있지 않다. 결국 고흥지역의 서훈 규모가 적은 것은 독립운동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흥 팔영산에 위치한 능가사 전경.고흥군 제공

◆ 팔영산 자락서 펼쳐진 혈전

다도해 해상공원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팔영산은 고흥의 진산(鎭山)에 해당한다. 고흥군 점암면에 있는 팔영산은 봉우리가 산세가 험준하고 기암괴석이 많아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팔영산이 한말 고흥 의병부대의 거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찾는 이는 많지 않다. 팔영산 등반로 입구에 있는 능가사에는 만경암, 서불암, 칠봉암 등의 암자가 딸려 있는데 이 일대에서 1907년 말 고흥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일 자에 "흥양군(고흥군의 옛 이름)에서 의병이 벌 떼와 같이 일어났다", "일본인 우체부의 구전에 의하면 9월 16일 밤 의병 500~600명이 봉기해 일본인 및 단발한 자를 만나면 즉시 포살하매 우편소와 경찰분파소의 직원들이 피난했다" 등의 기사가 있다. 이 기사들을 통해 고흥 의병의 규모와 전투력을 살필 수 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려진 후 해산군인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전쟁이 본격화됐는데, 불과 2개월도 되지 않아 고흥에서는 의병 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1907년 10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2년 동안 50여 회에 달하는 의병 전쟁이 고흥 관내에서 전개됐다. 1907년 11월 9일 의병 60명의 공격을 받은 흥양 분견대가 2시간 방어했으나 패퇴했다는 황성신문 기사가 당시 고흥 의병들의 규모를 잘 보여준다. 고흥에서 일어난 전투에 보성 의병장 안규홍 등이 참전한 모습도 여럿 보인다. 이는 고흥 의병과 보성 의병이 연합작전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흥 의병이 단독으로 일본군과 치른 전투 가운데 가장 처절한 전투가 1909년 7월 7일 의병 16명이 전사한 만경암 전투였다. 이 전투 상황은 일본군 전투일지에 상세히 나와 있다.

'(1909년) 본월(7월) 7일 관내 흥양주재소는 폭도 혐의자로서 체포한 이운택 등의 자백으로 흥양군 점암면 팔영산 만경암에 폭도 120명이 집회 잠복하고 있고, 적괴 안진사의 부하로 흥양군에서 의병 수괴로 활동한 군서기였던 신성구 당 29세 등이 같은 면 성주동에 잠복함을 확인하고, 흥양수비대 14명, 벌교수비대 8명, 헌병 1명, 헌병보조원 2명 등 25명으로 구성된 일본군 연합 토벌부대는 의병부대를 야밤에 기습 공격하고자 이날 오후 6시에 만경암으로 출동했다. 만경암 공격에 앞서 수괴 신성구가 잠복한 성주동을 포위하고 체포하려 했으나 의병의 보초에 노출돼 신성구와 부하 4명이 먼저 사격을 가하며 도주했다. 이에 계속 전진한 일본군 토벌부대는 계속 전진해 마침 저녁 식사 중인 폭도 120명을 급습했다. 이에 암자를 근거로 해 의병부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교전 1시간 후 격파됐다. 죽은 시신 16, 화승총 12, 군도 1, 탄약 약간과 피복 2점을 버리고 흩어졌다. 이에 계속 추격했으나 추가 전과는 없어 이튿날인 8일 오후 8시 일단 부대로 돌아왔다.'(일본군 폭도토벌 상보,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5)

팔영산 만경암에 의병 120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이 주둔했다는 것은 이곳이 의병본부였음을 말해준다. 팔영산은 산세가 험한 데다 고흥 유일의 겹산으로 의병들이 주둔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팔영산 주변은 평야 지대로 사방을 조망하기가 좋아 일본군 기습을 예방에도 최적의 조건이었다.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고흥 팔영산 만경암 항일 의병 전적지.고흥군 제공

◆두만강 건너 이어간 항일 의지

팔영산 만경암에 주둔한 의병부대의 지도자가 신성구였다. 신성구는 전직 군 서기이고, 당시 나이가 29세라고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이 의병 움직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본다. 수괴 신성구를 안 진사 부하라 했는데, 안 진사는 보성을 중심으로 활약한 안규홍 의병장을 말한다. 신성구를 수괴라고 했고, 그가 만경암에서 독립부대를 120명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성구는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이끌고 안규홍과 연합의진을 구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1909년 7월 8일 아침 식사를 하던 중 기습공격을 받은 고흥 의병은 일본군과 1시간 넘는 대접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16명의 의병이 장렬히 전사했다. 신성구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었다. 그는 연합의진을 구성한 의병장 김경윤과 함께 8월 10일 과역 시장에서 보급활동을 한 후 동강으로 이동했다. 김경윤은 1909년 9월 26일 일본군에 피체됐으나, 신성구는 두만강 건너편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의 족보인 '고령신씨세보 시중공파' 세보(世譜)에 "(성구가) 국운이 기울어지자 역학에 통달해 의병장에 선임돼 나라를 잃기 전후로 국경 및 노만(露滿) 각지에서 사투한 지 30년이었다. 1941년 4월 20일 졸"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곧 신성구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두만강 일대에서도 의병부대를 조직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고흥의 역대 향리 명단을 수록한 '영주연방선생안'에 '신성구'라는 이름이 보이며 그곳에 적힌 향리 계보와 신성구의 가계가 일치한다. 신성구가 향리 신분이었고, 그의 조상 대부분이 향리의 역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성구 부친 신창모는 향리를 거쳐 1906년 전라남도 관찰부 주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갑신정변에 연루돼 고흥 여도에 귀양 온 신기선 및 지방의 선비들과 교류했다.

신창모의 4남으로 태어난 신성구가 국내외에서 의병전쟁을 이끌다 보니 집안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슬하에 5남 1녀가 있었는데 1908년생인 막내인 완휴만 살아남았다. 완휴가 쓴 '봉헌만록'이라는 문집 후기에는 "그의 부친이 구한말 의병 참모장으로 출전했으나 실패하고, 국경으로 망명을 간 이후 5남 1녀가 거의 비명에 일찍 죽고, 완휴 1인만이 남아"라고 적혀 있다.

만경암 전투에 참여한 의병 120여 명 대부분이 고흥 출신으로 짐작된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이름을 올린 고흥 출신 의병은 송기휴, 이병채, 김영성, 김직순, 송계명, 송주헌 등 모두 6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고흥의병에 참여한 인물은 김영성, 송기휴, 김직순, 송계명 등 4명이다. 다행히 순천 지역 일본군 전투 기록에서 의병장 신성구, 김경윤 외에 이경삼, 이운택, 박명진, 지승섭 등 고흥의병을 추가 발굴했다. 고흥 출신인 이들이 고흥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신성구 의병부대의 일원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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